연차가 절반 넘게 남았다 — 쓰지 못한 세 사람의 달력을 열어봤다
연차 잔여일수 메일을 받고 나서 주변 세 사람에게 지난 8개월의 달력을 같이 열어보자고 했다. 셋 다 먼저 "바빠서"라고 답했지만, 표시했다 지운 날짜들은 다른 이유를 가리키고 있었다. 타이밍, 비용, 목적 — 세 가지 이유를 하나씩 짚어본 기록이다.
연차 잔여일수가 적힌 메일이 오면 잠깐 놀란다. 올해도 절반 넘게 남아 있다. 쓸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쓰지 않았다는 걸 아는데, 막상 이유를 말해보라고 하면 잘 나오지 않는다. 주변 세 사람에게 지난 8개월의 달력을 같이 열어보자고 했다. 언제 쓰려고 했는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취소했는지를 한 칸씩 짚었다. 세 사람 모두 "바빠서"라고 먼저 답했지만, 달력에는 다른 것이 적혀 있었다.
사례 1 — 좋은 날을 기다리다 성수기만 남았다
A는 3월에 이미 여행 계획이 있었다. 항공권 값이 내려가면 사려고 미뤘고, 4월엔 프로젝트 중간 보고가 잡혔고, 5월 연휴는 붙여 쓰기 아까웠다. 달력에는 '휴가 후보'로 표시했다가 지운 날이 일곱 개 있었다. 지운 이유는 매번 달랐지만 방향은 같았다 — 더 나은 날이 나중에 올 것 같았다. 8월이 되자 남은 선택지는 값도 비싸고 사람도 많은 날뿐이었다. A는 "그럴 거면 그냥 안 가고 말지"라고 했다. 아끼다 보니 쓸 수 없는 형태로만 남은 셈이다.
사례 2 — 하루를 비우는 비용이 이틀치였다
B는 연차를 쓴 날보다 연차를 쓰고 노트북을 연 날이 많았다. 오전에 두 번, 오후에 한 번 메시지를 확인했고 결국 반나절을 일했다. 돌아온 다음 날은 밀린 것을 따라잡느라 평소보다 늦게 퇴근했다. B의 계산은 단순했다. 하루 쉬면 이틀이 힘들다. 그래서 쉬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졌다. 달력을 보니 B가 마지막으로 연속 이틀을 쉰 건 작년 12월이었다. 하루짜리 휴가는 회복이 시작되기 전에 끝나고, 그 경험이 다시 '쉬어도 안 풀린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사례 3 — 쓸 날은 있는데 쓸 일이 없었다
C는 앞의 둘과 반대였다. 일이 몰리는 시기도 아니었고 눈치를 볼 상사도 없었다. 그런데 하루를 비워놓으면 뭘 해야 할지 몰랐다. 평일 낮에 혼자 있어 본 적이 오래됐다고 했다. 3월에 하루 쉰 날도 결국 집에서 밀린 집안일을 하다 저녁이 됐고, "이럴 거면 회사 가는 게 낫다"는 말이 나왔다. C에게 부족한 건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에 넣을 내용이었다.
달력에 남아 있던 것
세 사람의 이유는 각각 타이밍, 비용, 목적이었다. 겹치는 지점은 하나였다. 셋 다 연차를 '큰 것'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좋은 날씨, 완벽한 인수인계, 특별한 계획이 다 갖춰져야 쓸 수 있는 것으로 두면 그 조건은 웬만해서는 한 날에 모이지 않는다. 반대로 이번 달 안에 아무 날이나 하나 정해서 먼저 등록해둔 사람은 셋 중 아무도 없었다. 조건을 따진 흔적은 달력에 잔뜩 남아 있는데, 확정된 날짜는 없었다.
남은 넉 달의 달력을 함께 열고, 조건을 따지기 전에 날짜부터 하나씩 찍어보기로 했다. 그 하루에 무엇을 할지는 그다음에 정해도 늦지 않다. 적어도 지워진 일곱 개의 후보보다는, 확정된 한 개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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