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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이력서를 열었다 — 한 줄도 붙지 않은 칸을 들여다보며

Life-Up 편집부•
2026. 9. 6.
•3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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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만에 이력서를 열었다 — 한 줄도 붙지 않은 칸을 들여다보며

이직 생각도 없이 3년 만에 이력서 파일을 열었다가, 그 사이의 3년이 한 줄도 붙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일을 안 한 게 아니라, '내가 한 일'이라는 형태로 저장된 적이 없었을 뿐이었다. 채워지지 않는 칸을 들여다보며 알게 된 것들을 적었다.

이직할 생각은 없었다. 사내 게시판에 공고가 하나 올라왔고 지원할 마음도 딱히 없었는데, 내 이력서 파일이 어디 있는지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검색창에 '이력서'를 치니 3년 전 폴더에서 '이력서_최종_v3.docx'가 나왔다. 파일을 여는 데 2초,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데 4분이 걸렸다.

다 읽고 든 감정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낯섦이었다. 3년 전의 나는 그 문서 안에서 꽤 구체적인 사람이었다. 무엇을 맡았고, 그게 어떤 숫자로 남았고, 그래서 뭐가 달라졌는지가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뒤로 3년 동안 한 일은 그 문서에 한 줄도 붙지 않았다. 일을 안 한 건 아니다. 오히려 그 3년이 제일 바빴다.

칸이 비어 있던 게 아니라, 채울 말이 없었다

마지막 줄 아래에 커서를 두고 3년을 채워보려 했다. 설마 쓸 게 없을까 싶었다. 'OO 개편 참여'라고 한 줄 적고 나서 멈췄다. 참여해서 정확히 뭘 했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메신저를 거슬러 올라가 봤다. 회의록 스무 개쯤, 티켓 백여 개가 나왔다. 그걸 다 훑고 나서도 문장은 '참여'에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기억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애초에 '내가 한 일'이라는 형태로 저장된 적이 없었다. 그날그날 처리한 것들은 처리되는 순간 사라졌고, 남은 건 처리했다는 흔적뿐이었다. 흔적은 많은데 문장이 안 됐다.

매일 한 일과 이력에 남는 일은 다르다

3년치를 앞에 놓고 보니 두 종류의 일이 구분됐다. 하나는 하루를 꽉 채우는 일이다. 회의, 문의 대응, 남의 작업 검토, 급한 수정. 이건 안 하면 티가 나는데 해도 티가 안 난다. 다른 하나는 끝이 있는 일이다. 시작과 끝이 있고, 끝나고 나면 이름이 붙고, 내가 아니었으면 다르게 됐을 일.

3년 중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 건 두 개였다. 둘 다 6개월 넘게 붙잡고 있던 것들이다. 나머지는 전부 첫 번째였다. 바빴다는 감각은 첫 번째가 만들고, 이력서는 두 번째로만 채워진다. 그 둘이 다르다는 걸 알고는 있었는데, 3년어치를 한 화면에 놓고 보니 비율이 생각보다 심했다.

한 가지 더. 첫 번째 일들이 나쁜 건 아니다. 누군가는 해야 하고, 그걸 잘해서 얻은 신뢰도 분명히 있다. 다만 그건 문서에 안 남을 뿐이다. 안 남는 걸 안 남는 줄 모르고 3년을 보낸 게 문제였다.

분기에 한 번, 15분

이력서를 계속 고치기로 한 건 아니다. 그건 어차피 안 하게 된다. 대신 '재료'만 모으는 파일을 하나 만들었다. 분기가 끝나는 주에 15분 앉아서 세 가지만 적는다. 이번 분기에 끝난 것이 있나. 숫자로 남은 게 있나. 내가 없었으면 달라졌을까.

두 분기를 해봤다. 첫 분기엔 네 줄, 두 번째 분기엔 두 줄이 나왔다. 적게 나온 게 오히려 정보였다. 그 분기에 뭘 하고 있었는지를 다시 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잘 쓰려고 애쓰지 않는 게 요령이었다. 문장이 아니라 메모여도 된다. 나중에 문장으로 만들 때 필요한 건 표현이 아니라 사실이니까.

이력서는 다시 닫았다. 아직 지원할 곳은 없다. 다만 3년 뒤에 같은 파일을 열었을 때, 읽는 데 4분보다는 오래 걸렸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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